완벽한 추천의 함정: AI 시대에 종이 사전 필요?

‘오마카세’는 최근 셰프가 선호도를 맞춰 내어주는 ‘고급 큐레이션’의 대명사가 되었다. 넷플릭스가 내 취향을 귀신같이 알아맞혀 다음 볼 콘텐츠를 추천해 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둘 다 "당신의 노력을 최소화하고, 만족도를 최대화"하려는 서비스다.

그리고 AI는 이 ‘개인 맞춤형 큐레이션’을 극단으로 밀어붙일 것이다.

— 이것은 분명 장점이다. 우리는 시간 낭비 없이 ‘최선’에 가까운 것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최근 ‘종이 사전’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단어 하나를 찾으려면 알파벳 순서대로 한 장 한 장 넘겨야 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그 ‘비효율적인’ 과정에서 나는 원래 찾으려던 단어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다른 단어들, 비슷한 단어들까지 ‘우연히’ 눈으로 훑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게 분명히 있었다.

AI 시대, 이 ‘우연한 배움’은 사라지고 있다. AI는 내가 "A"를 물으면 "A’"라고 답할 뿐, 그 옆에 있는 "B"나 "C"를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정답’으로 직행하는 터널에 갇히고 있다.

‘오마카세-화(化)’되는 지식: 삭제된 과정

문제는 ‘효율성’이 ‘탐색’을 제거한다는 데 있다.

‘오마카세’와 ‘넷플릭스 알고리즘’의 공통점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당신보다 더 잘 안다"는 전제다. 이들은 나의 과거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장 안전한’ 만족을 보장한다. AI는 이 ‘예측’을 거의 완벽하게 해낼 것이다.

하지만 ‘종이 사전’의 경험은 달랐다.

종이 사전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몰랐다. 그저 모든 정보를 ‘A부터 Z까지’ 무식하게 나열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단어(Apple)를 찾기’라는 목적을 위해, ‘알파벳(A) 섹션 전체’라는 맥락을 통과해야 했다.

AI의 큐레이션: 1:1 ‘정답’을 제공한다. 지식이 ‘점(Dot)’으로 존재한다. 과정은 삭제되고 결과만 남는다.

종이 사전의 탐색: ‘정답’을 찾기 위해 ‘맥락’을 헤쳐나가야 한다. 지식이 ‘지도(Map)’로 존재한다.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가 또 다른 배움이다.

VFX 작업을 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예전에는 원하는 이펙트를 찾기 위해 메뉴얼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 과정에서 내가 찾던 기능 옆에 있는 ‘전혀 예상 못했던’ 기능을 발견했다. 그게 나중에 프로젝트의 시그니처가 되곤 했다.

AI는 우리를 ‘가장 효율적인 소비자’로 만든다. 하지만 종이 사전은 우리를 ‘서투른 탐험가’로 만들었다. AI 시대에 아이들에게 닥칠 가장 큰 위험은, ‘탐험’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추천’만 기다리는 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데이터가 말하는 ‘바람직한 어려움’의 힘

이것은 단순히 "옛것이 좋았다"는 감상이 아니다. 뇌과학과 인지 심리학은 이 ‘비효율’ 속에 숨겨진 학습의 비밀을 증명한다.

‘바람직한 어려움(Desirable Difficulties)’

UCLA의 심리학자 로버트 비요크(Robert Bjork) 교수가 제시한 개념이다. 그의 1994년 연구와 이후 30년간의 후속 연구들은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학습이 ‘쉽고 편안하게’ 느껴질수록(AI에게 바로 답을 얻는 것), 그 기억은 얕고 금방 사라진다. 반대로 학습에 ‘적절한 어려움’이나 ‘마찰’이 있을 때(종이 사전을 뒤지는 것), 우리 뇌는 "이건 중요한 정보다"라고 인식하고 더 깊고 오래 기억하려 노력한다.

비요크는 이렇게 말했다: "학습 중 빠른 성과 향상을 만드는 조건들은 종종 장기 기억과 전이를 지원하는 데 실패하고, 반대로 장기 학습을 지원하는 조건들은 학습을 더디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종이 사전의 ‘비효율’은 기억을 인출하고 저장하는 과정을 더 어렵게 만들어, 역설적으로 학습 효과를 극대화하는 ‘바람직한 어려움’이었던 것이다.

‘창의성’은 ‘무관함’에서 온다

창의성은 관련 있는 개념들을 깊게 파는 것(AI가 잘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 멀리 떨어진 무관한 개념들을 연결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AI의 완벽한 큐레이션은 ‘연관성’이 높은 정보만 필터링해 준다. ‘오마카세’는 내가 싫어할 만한 식재료(무관한 정보)를 원천 차단한다. 하지만 종이 사전은 ‘Apple’ 옆에 ‘Apology(사과)’를, ‘Physics(물리학)’ 옆에 ‘Physiology(생리학)’를 아무렇지 않게 배치했다.

이 ‘우연한 만남’이 뇌의 창의적 연결망을 자극한다.

결국 AI의 ‘완벽한 추천’은 우리 뇌를 ‘효율적인’ 경로에 가두지만, 종이 사전의 ‘무작위성’은 우리 뇌가 ‘창의적인’ 경로를 탐색하도록 훈련시킨다.

아이들에게 ‘우연’을 선물하는 법

그렇다면 AI 시대에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 AI와 검색 엔진을 금지할 수는 없다. "무조건 불편을 감수하라"는 것은 답이 아니다.

우리는 AI가 제공하는 ‘효율성’을 도구로 쓰되, AI가 제거해버린 ‘우연성’과 ‘마찰’을 의도적으로 설계해 주어야 한다.

‘정답’ 대신 ‘지도’를 줘라: 아이가 "고래는 포유류야?"라고 물을 때, AI는 "네"라고 답한다. 이것은 ‘점’이다. 이때 우리는 ‘지도’를 줘야 한다. "도서관에 가서 ‘동물 백과사전’ 한번 찾아볼까?" 백과사전이라는 ‘종이 사전’을 넘기며 아이는 ‘고래’ 옆에 있는 ‘돌고래’와 ‘하마'(물에 사는 다른 포유류)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효율’이 아닌 ‘탐색’을 칭찬하라: AI는 ‘최단 경로’를 보상한다. 우리는 ‘느린 경로’를 보상해야 한다. 아이가 종이 사전을 뒤적이는 ‘행위’, 도서관 서가 사이를 헤매는 ‘시간’ 그 자체를 칭찬해야 한다. 그것이 첼로의 삐걱대는 소리처럼, 뇌의 ‘탐색 회로’를 단련하는 과정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마카세’를 거부할 용기를 가르쳐라: AI가 추천하는 ‘당신이 좋아할 만한 10가지’ 목록을 때로는 거부하고, 일부러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의 책이나 음악을 접하게 해야 한다. ‘실패할지도 모르는’ 비효율적 탐색이야말로 — AI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는 ‘나’를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AI의 ‘완벽한 큐레이션'(오마카세, 넷플릭스)은 ‘정답’으로 직행하는 효율을 주지만, ‘우연한 발견(세렌디피티)’이 일어나는 ‘과정’을 삭제한다.

둘째, 데이터는 ‘바람직한 어려움'(종이 사전)이 뇌의 기억을 강화하고, ‘우연한 정보의 노출’이 창의성의 핵심임을 증명한다.

셋째, AI 시대의 교육은 AI의 ‘효율성’을 활용하되, 의도적으로 ‘비효율적인 탐색'(도서관, 백과사전, 아날로그 경험)을 설계하여 아이가 AI의 예측을 뛰어넘는 ‘우연성’을 만날 기회를 줘야 한다.

결국 AI의 ‘완벽한 오마카세’에만 길들여진 뇌는 AI의 예측 범위 안에 갇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그 ‘추천’ 목록 바깥으로 기꺼이 탈출하여, 자신만의 ‘우연한 발견’을 해내는 탐험가로 자라도록 도와야 한다.

주요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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