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개발자인 아빠가 식탁에서 발견한 ‘언어의 재탄생’ 순간
AI 엔지니어로 일하며 거대언어모델(LLM)의 성장 속도를 매일 목격합니다. 하지만 정작 제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건, 집 식탁에서 아이가 책을 읽고 난 뒤 자신의 말로 다시 말하는 순간입니다.
영어 문장을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감정‧해석‧상상을 섞어 의미를 재구성합니다. 때로는 제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표현도 아이는 오히려 더 쉽게 풀어냅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AI 시대의 문해력은 ‘읽기 능력’이 아니라, ‘다시 말하기 능력’에서 시작된다.
AI 시대의 문해력, 왜 이제는 ‘재구성 능력(Reconstruction)’이 핵심인가
AI는 텍스트를 통계적으로 예측해 생성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텍스트를 자기 경험과 감정으로 가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최근 연구에서도 이 점은 강하게 지지됩니다.
● 이야기 재구성 능력은 읽기 이해의 핵심
스페인어-영어, 광동어-영어 이중언어 아동을 추적한 연구에서는, 단어‧음독 능력을 통제해도 이야기를 구조화해 다시 말하는 능력(narrative skills) 이 읽기 이해의 중요한 예측 변수로 나타났습니다.
(Narrative Skills and Reading Comprehension Development)
즉, 읽기 이해는 글자를 읽는 능력이 아니라 의미를 다시 말할 수 있는 능력에서 만들어집니다.
● 반복 읽기 + 다시 말하기(retelling)는 언어 발달을 가속한다
폴란드-영어 이중언어 아동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읽은 이야기를 다시 표현하는 활동이 문장 구성력, 스토리 구조 이해, 어휘 다양성을 모두 끌어올렸습니다.
(Retelling a Model Story Improves the Narratives of Polish-English Bilingual Children)
또한 반복 읽기 + 리텔링 전략은 유치원 ELL의 표현력과 이야기 구조 이해를 크게 향상시킨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즉, 아이가 “읽고 → 자기 말로 설명”하는 행위는 과학적으로도 가장 강력한 리터러시 훈련이다.
뉴질랜드의 느린 교육 환경 속에서 더 빛나는 ‘자기 언어 만들기’
한국에서는 속도 있게 읽고 단어를 많이 외우는 교육 방식이 강조됩니다. 반면 뉴질랜드의 Year 1 교실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 자기 표현(self-expression) 입니다.
여기선 정답보다 다음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 그 아이만의 목소리
- 어떻게 느끼고 이해했는가
- 이야기 속 인물의 감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식탁에서 아이가 읽은 문장을 자기 해석으로 바꿔 말할 때, 저는 뉴질랜드 교육의 핵심이 그대로 녹아 있음을 느낍니다. 언어는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고, 속도가 아니라 깊이이기 때문입니다.
‘트랜스크리에이션(Transcreation)’ 관점에서 본 아이의 의역 능력
산업 현장에서는 단순 번역(Translation)과 **트랜스크리에이션(Transcreation)**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글로벌 콘텐츠 기업들은 “정확한 번역”보다 문화적 뉘앙스, 감정, 맥락까지 재창조하는 능력을 점점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Slator의 분석에 따르면, 트랜스크리에이션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합니다.
- 단어가 아닌 **의도(intent)**를 재현한다.
- 원문의 감정과 맥락을 새로운 언어에 맞게 창조적으로 재해석한다.
- “정확한 번역”보다 “자연스럽고 영향력 있는 메시지”를 목표로 한다.
이 정의는 아이가 영어를 읽고 한국어로 설명하는 과정과 거의 일치합니다. 아이는 원문의 단어를 1:1로 옮기지 않습니다. 대신 상황을 상상하고, 주인공의 마음을 느끼고, 자신이 이해한 방식으로 의미를 새롭게 빚어 냅니다. 즉, 아이는 이미 트랜스크리에이터에 가까운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귀여운 의역이 아니라, 글로벌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의미 재창조 능력의 초기 형태입니다.
결론: AI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자기 언어로 다시 짓는 힘은 인간만의 능력
AI 시대가 되며 ‘읽기’는 더 이상 특별한 기술이 아닙니다. 하지만 읽은 것을 자기 목소리로 변주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적 사고 과정입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독해가 아니라,
읽고 → 이해하고 → 자기 말로 다시 짓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유한 사고의 결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순간은, 거창한 교재도, 비싼 프로그램도 아닌—
바로 저녁 식탁에서 부모와 함께 책 한 줄을 다시 말해보는 그 시간입니다.